• 방문자수
  • 오늘11
  • 어제70
  • 최대167
  • 전체 27,716

정경부인 송조비

로고 > 뿌리탐구 > 정경부인 송조비

정경부인 송조비

m01.png 1) 출생과 가계(家系)

 

효녀(孝女)이자 열부(烈婦)인 송조비(宋祖妣)는 선조 8년(1575년) 8월 30일에 대덕구 중리동 은진송씨 대종가에서 태어나 효종 10년 (1659년) 4월 19일에 85세로 별세하셨다. 송조비(宋祖妣)는 본관이 은진(恩津)으로 쌍청당(雙淸堂) 송유(宋愉)의 5대 직계 종손인 임천 군수 송담(松潭) 송남수(宋柟壽)와 고려 때 대승(大丞) 품계를 받은 류차달(柳車達)의 후손인 선교(宣敎)1) 류형필(柳亨弼)의 딸 진주유씨(晋州柳氏) 사이에서 태어나셨다. 송조비(宋祖妣)는 조선조에서 새롭게 부상한 신흥사대부 집안에서 태어나 어려서부터 재덕을 겸비하였고 또 글 읽기를 좋아하여 경전(經傳)은 물론이고 백가서(百家書)에까지 통달하였으며 문장 또한 능숙하였다.

 

m01.png 2) 송애공의 모친 송조비의 출가

 

나이 20세 되던 1595년 을미년에 경주김씨 계림군(雞林君) 휘(諱) 균(稛)의 7대손으로 형조참의를 지낸 만취공(晩翠公) 휘 위(偉)의 아들인 조선 전기의 학자인 김광유(金光裕)와 혼인을 하였으나 임진왜란 중이라 시집에 들어가지 못하고 친정집에서 기거하며 몇 달을 머물러야 했다. 친정에서 머물던 중 남편이 갑자기 세상을 하직하였다. 부군인 김광유(金光裕)는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학덕이 높아 21세 되던 선조 24년(1591년)에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였다. 당시 학문이 깊어 문명(文名)이 높았던 신독재(愼獨齋) 김집(金集)과는 동갑으로 학문을 나누며 벗하고 지냈다.

 

1592년 4월 임진왜란이 일어나 사직이 바람 앞에 등불처럼 위태로울 때였다. 찬성공(남편인 金光裕)의 아버지 만취공(晩翠公) 휘 위(偉)는 형조참의로서 난을 평정하러 남원에 내려갔다가 선조 28년(1595년) 11월 22일 그 곳에서 하세하셨다. 이 소식을 듣고 달려간 찬성공은 혹한 속에서 초상(初喪)을 치르고 거상(居喪)하다가 그 피로와 충격으로 건강이 악화되어 아버지 하세후 1년 만인 26세의 젊은 나이로 선조 29년(1596년) 11월 24일에 그 또한 작고하였다. 송조비는 일찍이 어느 날 밤 하얀 학(鶴)이 방으로 들어오는 꿈을 꾼 적이 있었는데 찬성공이 기뻐하며 말하기를 “이는 범상치 않은 아들을 얻을 징조다”라고 기뻐하였다고 한다. 이렇게 현몽(現夢)하여 12월 19일 유복자로 태어난 분이 송애이다.

 

송애는 태어나서 어머니에게 글을 배웠는데 문예가 뛰어나 약관에 장원급제하였다. 이에 인조 2년(1624년)에 벼슬에 나가 별좌(別坐)가 되고 이어 직장(直長), 주부(主簿)를 거쳐 부여현감이 되었다. 익위사의 익위(翊衛)로 있던 인조 11년(1633년)에 문과에 급제하였고 이어서 예조정랑을 거쳐 사헌부 지평이 되었다. 이로부터 정언, 문학, 이조정랑, 홍문관교리 겸 교서교리 등을 역임하면서 삼자(三字)의 직함을 가지니 당대 최고의 지위에 오른 것이었다. 송애는 인조 14년(1636년) 병자호란이 나던 가을 홍문관 수찬으로 명나라 감군(監軍) 황손무(黃孫茂)를 사신으로 맞으러 갔으며, 겨울에는 청 태종의 침략으로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모부인(母夫人)을 모시고 호가(扈駕)하여 남한산성으로 들어갔다. 이때 유복자로 낳아 오로지 마음을 다해 키운 유일한 혈점인 송애공이 생명이 위험한 이조정랑 겸 독전어사로 임명되어 호란에 참여하게 되었다.

 

송조비는 아들이 그토록 위험한 직책을 맡게 되었음에도 오히려 의연하게 다음과 같이 훈계하였다. “의롭게 죽으면 그 영혼이 천추에 빛날 것이니 대장부가 비겁하게 물러서지 말고 나라를 위하여 충성을 다할 것”을 일렀다. 전란에 임해서도 송애공이 충분(忠奮) 격렬(激烈)하시니 모부인께서는 아들이 살고저 하는 마음이 없음을 아시고 한길이 넘게 굴을 파고 계집종에게 말하기를 “내 아들이 반드시 구차하게 살지 않을 것이다. 그가 죽으면 나도 또한 죽을 것이니 나를 이 굴속에 묻을 지어다.”하셨다. 이듬해 굴욕적 항복으로 화친이 성립되자, 탄식하면서 어가(御駕)를 따라 조정에 들어와서, 아들 송애를 데리고 향리인 회덕으로 돌아왔다. 돌아온 송애는 홀로 계신 어머니를 봉양하고 서책에 마음을 두면서 어지러운 시국을 달래었다.

 

1637년 가을에 그의 배청의식을 꺾기 위해 청(淸)나라 수도인 심양에 파견하는 심양서장관(瀋陽書狀官)2)을 제수 하였으나 모두 완강히 거절하며 한 번도 부임하지 않았다. 조정에서는 또 간직(諫職)과 금교역찰방(金郊驛察訪3)을 제수하여 불렀으나 응하지 않자 인조는 불사지율(不仕之律)이라는 죄목으로 치죄하여 금교본역(金郊本驛)4)에 유배시켰다. 송애는 유배지에 함께 간 어머니 송조비를 모시고 지극정성으로 봉양하며 귀양살이를 하셨다. 오래지 않아 사면 되었다. 다시 향리로 돌아온 송애는 작은 집을 짓고 송애당(松崖堂)이라는 현판을 걸었다. 이는 ‘송(松)’에는 눈서리를 맞아도 변치않는 소나무의 곧은 절개와 ‘애(崖)’ 는 높이 우뚝 선 절벽의 굳센 기상을 간직하겠다는 뜻으로 스스로 의미를 부여 하였다. 공은 유복자임으로 하여 부자(父子)간에 서로 알지도 못하였던 것을 지극히 애통하게 생각했는데 제사 때마다 슬퍼함이 사무쳤다. 날마다 관대를 갖추어 가묘(家廟)를 배알하였고, 또한 홀로 되어 자신을 기르고 가르치신 어머니 송조비를 극진히 섬겼다.

 

m01.png 3) 송부인의 효(孝)와 열(烈)

 

eunjin3_01.jpg

송조비의 친정(親庭)이나 시가(媤家)는 조선조의 명망있는 삼한갑족(三韓甲族)5)으로서 그 지체와 품위를 유지하고 있었다. 송조비는 그러한 사대부의 예의와 체통을 가훈(家訓)으로 익혀 행실과 언행에 어긋남이 없었다. 더구나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재덕(才德)을 갖춰 글 읽기를 좋아하여 학문에도 일가견을 이루었다.

 

1595년 21세에 경주가 관향인 찬성공과 육례(六禮)를 갖추어 혼인을 하였으나 임진왜란 중이라 시댁에 가지 못하고 친정인 송담공 댁에 머물러 있었다. 그런데 몇 달이 지난 뒤 시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그 여한으로 1년 만에 남편마저 26세의 나이로 갑자기 별세하니 송조비는 졸지에 청상(靑孀)이 되었다. 이 때 22세인 송조비의 뱃속에는 아이가 배어 있었다.

송조비는 하늘이 무너지는 듯 캄캄하였다. 이에 부인된 도리로서 종부지도(從夫之道)의 길을 택하기로 결심하고 마음을 평안히 위로 하고 남편을 따라 자결하려 하였다. 이러한 딸의 심상치 않은 동정을 살핀 친정아버지 송담공은 내심은 그 슬픔을 헤아리면서도 단호하게 타일렀다.

 

“청상(靑孀) 과부가 되어 남의 더러운 욕을 얻어먹는 것보다 차라리 남편을 따라가는 것이 아내의 길(婦道)이기는 하지만, 네 뱃속에는 남편이 남긴 자식이 자라고 있다. 만일 네가 죽으면 자식도 함께 죽을 것이니 이것은 남편에 대한 도리가 아니다. 더구나 네 남편이 남긴 흔적도 없게 될 터이니 이런 허무맹랑한 일이 어디 있겠느냐. 모든 어려움을 극복하고 그 피붙이를 잘 낳아 큰 사람으로 잘 기르는 것이 부도(婦道)의 으뜸이 아니겠느냐?”하고 타일렀다. 아버님인 송담공의 말씀은 이치에 닿아 있었으며 또한 엄중하였다. 송조비 또한 송담공의 훈계가 의당한 자신의 살아갈 길이라 믿어졌다. 이에 뜻을 꺾고, 그 말씀에 따라 뱃속의 아이를 잘 낳아 기르기로 결심하고 임신 중의 몸가짐을 각별히 주의하였다. 그리고 만삭이 되어 분만하니 다행히도 그 풍체가 늠름한 아들이었다. 이 아이가 바로 송애 김경여(金慶餘)이다. 송애가 말을 시작하게 되자 송조비는 선생을 구하지 아니하고 스스로 글을 가르치기 시작하였다. 아이가 총명하여 글귀를 빨리 깨우쳤으며, 송조비 역시 사서 삼경 뿐만 아니라 제자백가에 능해 훌륭한 스승으로서 손색이 없었다.

 

송조비는 이렇듯 경서를 읽히는 이외에도 가도(家道)를 세우고 나라를 다스리는 어짐과 덕성을 불어넣는 데도 소홀하지 않았다. 송애가 고관대작을 두루 거치면서도 청백리의 품위를 잃지 않은 것은 바로 어렸을 때 어머니에게 배운 이러한 학덕에서 연유한 것이다. 더불어 송조비는 제사를 받드는 일, 손님을 접대하는 일까지 소홀함이 없이 법도 있게 하였으며, 늘 성품을 온화하게 지닐 것을 당부하였다. 아들 경여는 어머니 뜻에 순종하면서 사계(沙溪) 김장생(金長生) 문하에서 수학하였고, 이러한 가르침에 힘입어 송애는 소과(小科)에서 장원 급제하였으며, 이어서 대과(大科)인 문과에 급제하여 벼슬이 홍문관부제학에 이르게 되었다. 병자(丙子)와 정축(丁丑)년의 호란(胡亂)에 대의(大義)를 내세워 몸소 행함으로서 사후에 문정(文貞)이란 시호가 내려졌고, 이러한 아들의 공으로 부친인 김광유(金光裕)께서는 좌찬성에 추증되었다. 이와 더불어 송애를 기르고 가르친 송조비에게는 종부직(從夫職)으로 정경부인(貞敬夫人 종1품)의 품계가 추증되었다.

 

송조비가 청상(靑孀)으로 절행(節行)을 실천하지 않았다면 송애와 같은 명현은 있을 수 없었다고 조야(朝野)에서 높이 평가하였다. 송조비는 임진왜란 중에 시부모님이 돌아가시자 받들지 못하고 잃은 것이 천추의 한으로 생각하고, 그 정성을 친정 부모에게 다하였다. 그 곳에서 송애를 길러 그 자식을 훌륭한 인물로 만들었으니 송조비에게 있어 친정인 은진송씨 대종문(大宗門)은 그대로 시댁과 다름이 없었다. 이에 송조비는 친정 부모님께 효성이 더욱 더 각별하였는데 송담공 또한 이를 대견스럽게 여겨 집안 분위기는 항상 온화하고 정겨웠다. 세월이 흘러 송담공이 구토를 하는 노환(老患)으로 눕게 되었는데 백가지 약으로도 효험이 없이 위중한 상황에 이르게 되었다. 이때 송조비는 ‘내 뼈와 살은 부모께서 물려받은 것이니 부모를 위해 바침이 마땅하다’라고 하면서 손가락을 잘라 그 피를 입에 넣어 드리고. 끊어진 손가락의 뼈를 태워 가루로 만들어 복용하게 하니 송조비의 간절하고도 진정한 그 효심에 하늘이 도왔음인지 송담공은 이에 눈을 뜨고 구토가 멈추고 말을 하게 되었으며 송담공께서는 완쾌되어 90세의 천수를 누렸다.

 

또 한번은 친정 어머니 진주류씨가 등창(背腫)으로 고통이 심하여 위급하게 되었다. 이에 송조비는 아버지 때와 같이 손가락을 잘라 뼈를 태워서 가루로 만들어 종양부위에 뿌리니 상처가 곧 아물고 아픈 증세가 가라 앉았다. 병이 나은 후 집안 어른들과 세상 사람들은 한번도 어렵겠거늘 두 번씩이나 위태로운 일을 하였으니 하늘이 낸 효녀라고 칭송하였다. 송조비는 효종 10년(1659년) 4월 19일에 회덕 송촌 옛 집에서 향년 85세로 천수를 다하고 하세하셨다. 이에 경향(京鄕)의 사림(士林)들은 그 효행(孝行)과 열행(烈行)을 칭찬하여 조정에 천거하니 영조 5년(1729년) 6월에 지극한 효성을 기리기 위해 정려의 은전을 받아 정려각을 지으니 『효녀 정경부인 은진송씨 정려』이다.

 

정려각은 나라에서 송조비의 지극한 효성을 기리기 위하여 내려 준 정려기를 보호하기 위한 건물이다. 정려기란 나라에서 충신, 효자, 열녀 등을 기리기 위해 이름이나 관직을 적은 것이다. 은진송씨 정려각은 지붕 옆면이 여덟 팔(八) 모양인 팔작 지붕집이며, 기둥 위에서 지붕을 받치는 공포(栱包)6)가 화려하게 장식된 조선 후기의 특징을 갖추고 있으며 지금도 법동에 우뚝 서 있다. 송조비의 가장 훌륭한 점은 송애공 가문에 가도(家道)를 세웠다는 점이다.

 

eunjin3_01.jpg1653년 58세로 별세한 아들 송애공의 가장(家狀)을 5년 뒤 84세의 고령임에도 한글(총 56面, 1面 14行, 1行 평균 20字 분량 15,400여 字)로 지었으며, 어머니가 아들의 가장을 남긴 사례를 들어 보지 못했다. 부모가 자식보다 먼저 죽는 것이 상례이고, 또한 아들을 위해 가장을 쓴다는 것이 보통의 어머니가 아니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훌륭한 업적을 남기신 송애선조의 어머니 송조비는 학식이 깊을 뿐만 아니라, 이를 생활로 실천하여 어버이에게는 참 효녀요, 아들에게는 훌륭한 스승이었으니 송애공파 가문의 대모이시다.

정려각은 1993년 6월 21일 대전시유형문화재 제24호로 지정되었다.

한국효열록(韓國孝烈錄 80면 참조)

위치 : 대전광역시 대덕구 법2동 205-5 (계족로 598번길)

그 정려문(旌閭門)에는

孝女 贈崇政大夫議政府左贊成 兼 判義禁府事 五衛都摠府都摠管

成均進士 金光裕妻 貞敬夫人恩津宋氏之閭

崇禎 再己酉 今上 五年 六月 日 命旌

이라고 쓴 편액이 있다.

 

묘소 : 세종시 연동면 응암리 산63-1 부동 부임 壬坐之原에 찬성공과 합폄하였다. 증손 창석이 행장의 기록을 지었다.

 

송조비의 일생은 신혼의 단꿈이 깨기도 전에 시아버지가 하세하시고, 시아버지 삼년상을 치르는 도중에 건강이 악화된 남편마저 사별하는 불행을 1년 사이에 2번을 겪으면서도 오로지 유복자 아들을 훌륭하게 가르치고 길러서 한 가문의 쇠락한 기운을 일으켜 세우고 국가의 동량지재(棟樑之材)가 되게 하셨으니 송조비의 자식 사랑과 부모에 대한 효행은 사회의 귀감이 되었다.

 

 

은진송씨 정려 중수기(恩津宋氏 旌閭 重修記)

金世基(갈천공의 13세손. 갈천공의 종손) 찬(撰)

호서의 회덕 중리 밖이 되고 달이 비치는 시골나라에 내 일가의 선조 할머님 효녀인 정경부인 송씨의 정려가 있다. 정경부인은 은진의 양반세가인 군수 송담(松潭) 남수(枏壽)의 따님으로서 진사 증좌찬성 경주 김광유(金光裕)의 배필이요 부제학 송애(松崖) 문정공(文貞公) 경여(慶餘)의 어머님이시다.

 

정경부인은 선조(宣祖) 을해생(1575년, 선조 8년)으로 본성이 효심이 있어 가정에서는 어버이를 밤낮으로 곁에서 모셔 겸양한 기개는 공손하고 완만하여 하나도 뜻을 어기지 아니했는데 불행히 일찍 과부가 되어 부모에 의지하여 살면서 정성을 다해서 봉양하였다. 아버지가 병이 있을 때 부인께서 인분을 맛보고 하늘에 대신 죽기를 원하고 빌었으며 손가락에 피를 내어 입에 넣어주고 손가락 뼈를 잘라 먹여 드리니 결국 신효하게 효과를 보았다. 그 후 어머니 병환에도 손가락을 잘라 먹였다. 상을 당하여는 3년동안 죽을 먹으며 머리에 빗질도 아니했고 손수 상식을 드렸다.

 

이러한 일이 조정에 소문이 나서 아름답게 여겼고 세금과 부역을 면제하는 복호(復戶)를 주려는데 부인께서는 부끄럽게 여기며 효도는 스스로 당연히 행하는 것이라면서 사양하고 받지 아니했다. 드디어 문순공 수암 권상하(權尙夏)가 지은 그 묘표(墓表)에서 주역에 말하기를‘적선(積善)하면 반드시 나머지 경사가 있다.’ 고하니 그윽이 생각하건대 오직 효(孝)란 백가지 행실의 근원이며 선한 것은 효행보다 더 큰 것이 없다. 부인께서 이 지극한 효행이 있다고 하므로 수명도 85세나 하였다.

 

아들의 귀(貴)로 여러 번 봉(封)해져 정경부인(貞敬夫人)까지 하였으니 아들은 도학과 절의로써 인(仁)과 효(孝)를 한 명신이다. 그 후에 후손이 번창을 이루어 벼슬이 혁혁하였고, 또 대대로 효성이 많아 집안 명성을 떨어뜨리지 않았으니 하늘의 베품과 갚음은 속임수를 아니한다. 영조 정미(1727, 영조 3)에 첨정(僉正) 송상증(宋相曾) 등 100여 인이 그 일을 현에 올리고 현감 유신전(柳紳轉)이 도에 보고하고 도백(道伯) 설재(雪齋) 김려(金礪)가 조정에 아뢰어 기유년(1729년, 영조 5년) 6월에 특별히 정려(旌閭)를 명하는 은전을 베풀었다.

 

지금까지 240여년의 오랜 세월이 지났다. 정려가 무너지고 허물어져 후손 정현(正鉉) 정두(正斗) 정련(正璉) 학규(學圭) 학전(學銓) 학주(學周) 등이 힘을 합해서 보수하고 단청하여 거듭 새롭게 되었는데 새로 돌담을 설치하고 철문을 달아 보호하니 보기에 더욱 뛰어나고 듣기에도 더 흥겹다. 이것이 다 그 효(孝)하는데 다하는 것 이리라. 공역을 마치고 고하는데 내게 기문을 부탁하기에 나도 설재공(雪齋公 金礪)의 후손으로서 더욱 간절히 정경부인을 감모하는지라 사양하지 못하고 위와 같이 삼가 쓰노라.

광복 32년 병진(1976년) 4월  일 족 후손 김세기(金世基)는 삼가 기록하고 10대손 정현(正鉉)은 삼가 쓰다.

 

 

1) 선교(宣敎) : 나라에 경사가 있을 때 반포하는 교문(敎文)을 읽던 벼

2) 심양서장관(瀋陽書狀官) : 청나라 수도 심양에 보내는 사신을 따라 보내던 임시 벼슬로서 외교문서의 작성과 사절 일행의 감찰에 관한 일을 기록하는 관리

3) 금교역 찰방(金郊驛察訪) : 청나라 사신을 맞이하는 길목의 역참 일을 맡아보던 문관

4) 금교본역(金郊本驛) : 지금의 황해북도 평산

5) 삼한갑족(三韓甲族) : 대대로 문벌이 높은 집안

6) 공포(栱包) : 처마 끝의 무게를 받치기 위하여 기둥머리에 짜 맞추어 댄 나무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