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애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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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애공은 16세기 말에서 17세기 중기의 정치적인 격변기에 살았던 고상한 선비요, 소신있는 관료이며, 지극한 효자이었다.
한마디로 충 · 효 · 예를 갖춘 관료이자 선비였다.
자는 유선(由善), 호는 송애(松崖), 시호는 문정(文貞)이다.
아버지는 찬성(贊成)에 추증된 김광유(金光裕)이며, 어머니는 송남수(宋柟壽 恩津人)의 딸이다. 이귀(李貴 延平府院君, 延安人)의 사위이며, 김장생의 문인이다. 송시열, 유계, 송준길, 김익희 등 당시의 석학들과 더불어 학문을 논했다.
공의 아버지는 1595년 11월 22일 할아버지(晩翠公 金偉)의 상(喪)을 당한 슬픔으로 3년상을 치르다가 병을 얻어서 돌아가시니 할아버지가 돌아가신지 꼭 1년만인 1596년 11월 24일이었다. 아버지 돌아가신 후인 1596년 12월 19일 유복자로 태어나 유아시절에 어머니에게 글을 배우고 사서 · 춘추 · 시경을 교육 받으셨고 1611년 16세에 생원 초시에 합격하고 1613년 사계 김장생(金長生) 문하에 들어가 성리학을 수학하며 선비가 지키고 실천하고자 하는 정신을 교육받았다. 1615년 진사 초시에 장원하였다. 공은 1623년 장인인 이귀가 반정의 필연성을 역설하고 의견을 묻자, “명분이 바르고 순리라지만 은(殷)나라 재상 이윤(伊尹)과 같은 뜻이 없으면 불가합니다. 또 외생 한 사람 그 일에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이 아닙니까” 라고 소신있게 잘라 말하고 고향으로 돌아와 인조반정 음모에 참여하지 않았다.
공은 국가 위기 시에는 꼭 참여하여, 3번이나 임금을 호종하는 충성심이 있었다.
1. 1625년 이괄의 난 때 공주로 임금을 호종하였고
2. 1627년 정묘호란 때는 강화도로 호종하였으며
3. 1636년 병자호란 때는 남한산성으로 호종하였다.
1624년(인조 2)에 별좌(別坐)가 되었으며, 그뒤 직장(直長) · 주부(主簿)를 거쳐 1627년(인조 5)에 부여 현감에 제수되었고 1628년에 선정지포상(善政之褒賞)으로 품복(品服)을 하사받았고, 1632년에 세자익위사 익위(世子翊衛司 翊衛)가 되었다. 1633년 식년문과에 을과로 급제하고, 이후 정언(正言), 예조정랑을 지냈으며 사헌부 지평(持平)으로서 한창 진행 중이던 인경궁 수리공사와 대군의 저택을 영선하라는 명을 중단하도록 임금께 글1)을 올렸다가 성균관 직강 · 시강원 사서로 좌천되었다. 이어 사간원 정언(司諫院 正言)을 지냈다. 1636년에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독전어사(督戰御史)가 되어 왕을 호종하여 남한산성으로 들어갔으며, 이조정랑 겸 독전어사로 전쟁에 참여하여 국가의 위기극복을 위해 노력하였다.
청나라의 무도한 침략전쟁을 겪고, 청나라에 항복하고 삼전도 굴욕으로 분개하면서, 우리나라는 의리의 근간이 무너졌다고 판단하여, 주화파(主和派) 최명길(崔鳴吉)을 만나 공박(攻駁) 담판하고 모든 관직을 버리고, 고향인 회덕으로 돌아왔다. 그뒤 병자호란으로 왕의 권위가 떨어진 인조가 계속해서 벼슬을 주었지만 첫 번째 홍문관 부응교부터 12번의 임명을 거부하고 주화파의 최명길(崔鳴吉)을 징계하도록 상계1)를 올리기도 하였고 최명길의 조롱으로 불화가 쌓여 1638년 청나라 심양에 파견되는 서장관(書狀官)으로 뽑혔으나 모두 완강히 거절하며 부임하지 않자 다시 금교역 찰방에 제수하였고 또 불응하자, 인조는 불사지율(不仕之律)로 치죄하여 황해도 금교본역(金郊本驛)으로 귀양살이까지 하게 하였으니 억울함으로 평생 북벌계획을 고수하였다.
1639년 공은 귀향하여 회덕 배달촌에 별당인 송애당을 건립하고 유계(俞棨), 윤문거(尹文擧), 송준길(宋浚吉), 이유태(李惟泰), 송시열(宋時烈), 권시(權諰), 김익희(金益熙) 등 제현과 더불어 강학을 함께하며 삼전도의 굴욕을 씻기 위한 대의를 말씀하시니 이것이 바로 북벌론의 효시가 되었다. 1649년 승지로 발탁되었으나 끝내 사양하였다.
1649년(효종 원년)에 성균관 대사성을 거쳐 대사간으로 소명하니 나아가 독대하여 육조소(六條疎)2)를 임금에게 아뢰어 춘추대의를 밝혔으며, 영의정에서 파직된 뒤 효종의 북벌계획을 청나라 관계 요인에게 밀고하는 모역사건에 연루된 김자점(金自點)을 ‘전권오국지죄’로서 탄핵하여 먼 곳으로 귀양을 보내도록 효종에게 강력히 주장하여 실현시킴으로써 조정의 기강을 바로 세우는데 크게 이바지 하였다. 당시로서는 생사를 건 일대결단이었고 오직 국정을 바로 잡고자 하는 애국심의 일념에서 행한 용단이었다.
이듬해인 1650년(효종 1) 충청도 관찰사가 되어 백성들의 교화에 힘쓰고, 군함을 만들고 군사를 훈련시키며 청에 대항할 군사력 배양에 힘썼다. 또 조정에 올리는 모든 공문과 상소에 청나라의 연호를 사용하지 않았으며, 조정의 지시가 거듭되어도 뜻을 굽히지 않고 스스로를 탄핵하여 파직시켜줄 것을 청할 뿐이었다.
공은 1650년 효종 1년 충청도 관찰사 재직 시에도 청나라 연호를 사용하지 않아 물의를 일으킨 점과 효종이 즉위한 후에도 청나라 사신이 여러모로 협박 공갈하여 양가집 처녀를 징발하여 올리라는 요구에, 비변사의 여러 대신들이 밀서로서 통보해 왔으나 답서에서 “이 일은 나라의 명맥을 크게 훼손하는 것이라 하며 차라리 항명 불복한 죄나, 직무유기의 처벌을 받을지언정 이 일은 결단코 할 수 없다.”하면서 마침내 이에 응하지 않아 효종을 화나게 하였다.
1653년(효종 4) 대사간과 홍문관부제학을 제수하였으나 병으로 사퇴하고 나가지 않다가 그해 5월 12일 58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죽음에 임하여 유소(遺疏)를 올려 ‘임하(林下)3)의 어진 이들 가운데 인재를 구하여 쓸 것’을 진달하니 효종이 가상히 여겨 특별히 비답을 내렸는데, 유소에 비답을 내리는 일이 이로부터 시작되었다. 또 왕이 의례와 같이 부의를 내리고, 예관을 보내어 조문하고 제를 지내게 하였다. 사후에 숭정대부 의정부좌찬성 겸판의금부사 세자이사 지경연 춘추관 성균관사 홍문관대제학 예문관대제학 오위도총부도총관에 증직하였다.
다시 영조가 1756년(영조32) 4월에 예관을 보내 치제하고, 대광보국숭록대부 의정부영의정 겸영경연 홍문관 예문관 춘추관 관상감사 세자사를 증직하였다. 3년 후인 1759년(영조35)에 시호를 문정(文貞)으로 하사했다. 학문에 근면하고 묻기를 좋아하는 것을 ‘문(文)’이라 하고, 청백하고 절의를 지키는 것을 ‘정(貞)’이라 한다. 시장(諡狀)은 유척기(俞拓基)가 지었으며, 1796년(정조20)에는 존주휘편(尊周彙編) 및 황조배신전(皇朝陪臣傳)에 기록되었다.
공은 인품이 빼어나 성품이 굳고 곧으며, 처신(處身)이 방정하고 엄정하며, 과묵하고 엄숙하였다. 출처(出處)와 의리에 분명하여 당시 사람들로부터 강직하여 진퇴(進退)에 구차스러움이 없었다는 평을 받았다. 송준길 · 송시열과 친교가 두터웠다. 공은 사후 1701년(숙종 27) 회덕의 정절서원(靖節書院)에 배향되었다. 문집으로는 1817년(순조17)에 간행된 『송애집(松崖集)』이 있다.
별당의 위치는 대전광역시 대덕구 중리동 115번지 쌍청근린공원 내에 대전광역시 유형문화재 제8호로 보존되고 있고 공의 묘소와 신도비, 재실은 세종특별자치시 연동면 응암리 산63-1에 있다.
1) 상계(上啓) : 정묘호란 이후 변방이 소란하고 나라의 재정이 고갈되며 민심이 동요하는 시기에는 궁중의 공사가 적합하지 못함을 지적하고, 군신상하가 와신상담(臥薪嘗膽)으로써 서로 격려하여 변방을 방어하고 도적을 칠 계책을 세워야 할 것이요, 긴급하지 않은 일은 일체 정지 할 것을 요구하였다. 2) 육조소(六條疎) : 一. 親其親 以仁其民 친족을 친하게 함으로써 그 백성을 사랑하고 二. 嚴宮禁 以正家法 왕궁을 엄히 함으로써 가정의 법도를 바르게 하며 三. 遠戚畹 以淸仕路 권문척신을 멀리 함으로써 벼슬길을 맑게 하며 四. 崇道學 以壽國脈 도학을 숭상 함으로써 나라의 기반 언로를 튼튼히 하며 五. 立大志 以爲內修之本 큰 뜻을 세움으로써 안으로 국력을 기르는 근본을 삼고 六. 養人才 以爲外攘之實 인재를 등용함으로써 밖으로 외적을 물리칠 실력을 길러야 한다. 3) 임하(林下) : 학덕은 높지만 벼슬을 하지 아니하고 산속에 숨어 사는 은사(隱士)가 있는 곳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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